배꼽의 용도 코스모스펀드 01-04 16:37
이름: 남향창가 2006/3/1(수) 배꼽의 용도   |     방학도 다 끝나가는데 어디 나들이라도 한번 하자는 식구들의 등살에 기껏 행선지를 정한 것이 부곡 온천이었다. 온천장에 살면서 또 온천이야? 그긴 그래도 큰 수영장이 있잖아. 게다가 우리 동네가 부곡4동인데? 그럼 산행을 하자는 내 말에 하나같이 고개를 젓는다. 춥고 미끄러운데 차라리 부곡 온천으로 가자며 쉽사리 만장일치. ”수영 안 하실라우?” 아이들이 수영장에 들어가서 노는 것을 보다가, 중국기예단의 서커스 공연을 한참 보다가 그래도 시간이 남는 것 같자 아내가 한 마디 했다. “글쎄, 수영복도 없고……” “우리 수영복도 가져 왔는데요.” 어랍쇼. 내 수영복이 있긴 있었나. 수영을 해 본 것도 정말 오래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수영장에 풍덩 뛰어들고 나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체계적으로 배운 수영 실력 때문인지 너나 할 것 없이 멋지다고 표현해야 할 만큼 수영을 잘했다. 나는 수영을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었다. 어릴 적 저수지에서 수초를 붙잡고 배운 수영, 이른 바 개헤엄이 전부인 나로서는 그 사람들 사이에서 첨벙거리며 수영할 용기가 도저히 없었다. 그냥 나오기도 뭣해 어색하지 않게 물 속으로 잠수하여 거꾸로 서기를 몇 번 시도하다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수영장 밖에 서서 선수같이 날렵한 자세로 물 속에서 노는 사람들을 보니 불현듯 옛 생각이 떠올랐다. 어릴 적 나는 방학이 되었다고 해서 놀러 다닐 형편이 못 됐다. 당시 농촌의 우리들 코질찔이에게는 피서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겨우 친척집에 며칠 놀러 가는 정도는 허락하셨지만 우리 집에서는 남에게 폐가 된다고 그도 못하게 해서 나는 여름 방학 내내 집에 있어야 했다. 사정이 이러니 근처 저수지에 가서 노는 것이 나의 방학생활의 전부였다. 옆집에는 매년 방학이 되면 부산에 사는 친척 애가 놀러 오곤 했다. 부산 동래의 온천장에 산다는 그아이는 나와 동갑이었다. 나의 유일한 기다림은 그 애가 빨리 친척집에 오는 것이었다. 그 애와 나는 참외밭 원두막에서 책을 읽다 근처 저수지에 가서 수영을 하거나 잠자리를 잡으며 놀았는데, 잠자리 잡는 것이야 내가 훨씬 뛰어났지만 수영은 그 애가 나보다 훨씬 나았다. 그 애가 어떻게 수영을 배웠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보다 속도도 빠를 뿐 아니라 폼도 좋아서인지 은근히 자기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저수지 가로질러 가기 시합에서 매번 지던 나는 어느 날 저수지 다섯 바퀴돌기 장거리 시합을 하자고 제안했다. 초반에 나보다 훨씬 앞섰던 그 애가 몇 바퀴를 돌자 점점 뒤처지게 되었다. 이번에는 이겼다 싶어 신이 나서 한참을 앞으로 나아가는데 왠지 뒤에서 물장구치는 기척이 없는 것 같았다. 자신이 생긴 나는 얼마나 많이 뒤처졌는가 하고 돌아보았더니 웬일인지 그 애가 물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자신이 없으니 포기하고 장난한다는 생각이 들어 가까이 다가 갔더니 그 애가 순식간에 내 머리를 껴안고 어깨 위로 올라타는 것이었다. 놀란 나머지 떼어 내려 했으나 정말 엄청난 힘으로 잡고 있어서 도저히 떼어낼 수가 없었다. 우리 둘은 허우적거리며 물 속으로 들어가 한참 물을 마시고 나오기를 반복하면서 점점 저수지 안으로 밀려 들어가고 있었다.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한참을 이렇게 안으로 밀려 가고 있는데 갑자기 내 손에 막대기가 하나 잡혔다. 필사적으로 이것을 잡으니 밖으로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저수지 가장자리에 자라는 창포줄기 속에 내 몸이 걸리는 것이었다. 의식은 멀쩡했으나 기운이 없어 창포줄기에 누워 있으려니 누군가 아직 내 머리를 붙잡고 있는 그 애를 떼어 내면서 뺨을 때렸고, 그 순간 나는 눈을 떴다. 햇살을 등지고 이웃에 사는 고등학생 형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그 애도 잠시 후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그 형은 저수지가 내려다 보이는 원두막에서 두 사람이 허우적거리는 것을 발견하고 새를 쫓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장대를 들고 뛰어와 우리 둘을 꺼내준 것이었다. 그 시절 방학식이 시작되는 날, 교장선생님께서는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특별훈시를 하셨다. "배꼽은 우리 몸에 별 쓸모가 없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여러분들이 물놀이를 할 때 그보다 더 깊은 곳에 들어가지 말라는 유용한 표시인 만큼" 이라고 하시면서 깊은 물에 들어가지 말고 수영을 할 때는 어른들과 함께 다니라는 당부를 하셨다. 그 시절 여름방학에는 익사사고가 심심찮게 생기곤 했었다. 더구나 깊은 저수지에는 수영금지라는 표시까지 해 두었는데 나는 그걸 무시하고 놀다 일을 저질렀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고 도회지에서 놀러 온 애와 함께 일을 저질렀으니 학교뿐 아니라 당장 아버지에게 혼이 날 노릇이었다. 그 형은 나의 이런 걱정을 눈치챘다. 그는 "이 일을 무서운 너희 아버지가 알면 혼 날테니, 앞으로 내 말만 잘 들으면 비밀을 지켜주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 해 여름 나는 그 형이 원두막에 누워 냉수를 떠오라고 고함만 지르면 총알같이 뛰어가 주전자에 시원한 우물물을 떠다 바쳤다. 자기 집에 없는 "개구리 참외"가 먹고 싶다면 몰래 따다 주고 가끔은 아버지 담배를 몇 개비씩 꺼내 바치며 가슴 졸이며 지내야 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지금의 내 수영실력이 그 당시 퐁당거리던 실력이 전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나도 수영을 꽤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수영장에 있는 애들과 비교하니 물장구치는 수준에 불과하였다. 그나저나 오래 전에 듣기로 직업군인이 되었다는 어푸어푸 그 부산 아이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리고, 지금 내가 부산 하고도 온천장에 살고 있는 것은 무슨 인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