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해이 문화일보 09-02 09:03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해외 언론은 시시각각 어려움이 더해가는 한국경제를 보도하면서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한국의 기업이나 금융기관 등이 모두 여차하면 정부가 구해주겠지라는 도덕적 해이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잘못을 근본적으로 치유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기업이나 금융권을 지원하기보다 파산케 함으로써 쓴맛을 보게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실패 없는 자본주의란 원죄의식 없는 종교와 같다.” 당시 해외 언론이 한국경제를 묘사하면서 즐겨 쓰던 표현이다. ‘도덕적 해이’나 ‘시장의 징벌’ 등의 표현이 오랜만에 다시금 매스컴을 장식하고 있다. 이번에는 한국이 아니라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 대출) 부실사태와 관련해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해 유동성 위기가 발생할 경우 무제한 통화를 공급해 지원하겠다고 발표하자 일부 경제학자들이 도덕적 해이의 폐해를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특히 모건스탠리의 이코노미스트로 명성을 떨쳤던 앤디 시에는 파이낸셜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중앙은행이 시장에 개입하지 말 것을 촉구하기까지 했다. 그에 따르면 남의 돈을 빌려 고수익을 얻으려 했던 투자자들과 이를 방관한 금융인, 투자 안내자 역할을 다하지 못한 신용평가사, 수수료 챙기기에 급급했던 헤지펀드가 이번 사태를 책임져야 할 당사자다. 따라서 이들이야말로 시장의 징벌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그는 월스트리트에는 중앙은행이 위기 해결사 역할을 할 것이라는 믿음 탓에 능력 이상으로 리스크를 끌어안는 경향이 있음을 들어 이번 기회에 악습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충고를 빼놓지 않았다. 물론 도덕적 해이에는 책임이 뒤따를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1997년 정부가 대부분의 책임을 떠안은 한국이나 지금의 FRB는 문제가 있다. 미래에 더 큰 시장 실패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부나 중앙은행이 시장의 징벌에 맡겨둔 채 뒷짐 지고 있다가는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국제금융계에 금융불안의 연쇄 파급을 불러올 수도 있다. 도덕적 해이와 징벌의 정도는 어느 선에 맞춰져야 하는지 우리 모두가 어려운 숙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이신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