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대통령이 21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청와대

"대불 산단 전봇대 2개를 뽑은 일."

많은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꼽는 이명박 대통령의 '치적'이다. MB 정부에서도 취임 100일을 맞아 '확 바뀐 공직사회-군살 빼고 규제완화 실천 새 바람'이라는 평가 글에서 대불산단 전봇대 사례를 거론했을 정도다.

"지난해 목포 대불공단에 가 봤는데 공단 길 건너편 교량에서 대형트럭이 커브를 트는데, 거기 폴(전봇대)이 서 있어서 잘 안 된다. 그 폴을 옮기는 것도 몇 달이 지나도록 안 된다고 하더라... 오늘 말했으니 아마 됐을거야.(웃음)"

지난 1월 중순 당선자 시절, 인수위 간사회의에서 던진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산자부 장관이 부랴부랴 공식사과 했고, 공무원들은 '전봇대 뽑으러' 대불공단에 달려갔다. 며칠 만에 전봇대가 뽑혀졌다. 이후 '대불산단 전봇대'는 탁상행정의 대표적인 규제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어느 정도의 영향력과 상징성을 갖는지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은행들의 자구 노력 선언은 정부의 치적?

그러던 차에 새로운 MB 정부의 치적으로 기록될만한 또 다른 일이 생겼다. 오늘(22일) 시중 은행들이 '스스로' 임원의 연봉을 깎고, 해외자산 매각 등 자구 노력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1만원 타행 송금이나 인출에도 몇 백원씩의 수수료를 받아 수익을 쌓았던 그간의 행태에 비하면 상전벽해 같은 변화였다. 이렇게 기특한 일이 벌어지다니.

이러한 은행들의 기특한 변신의 뒤에도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있었다. 바로 전날(21일) 이명박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국민 세금으로 혜택받는 은행들이 고임금 구조를 유지한 채 정부 지원을 받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며 알아듣기 쉽게 은행들의 도덕적 해이를 질타했다. 혹시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있을까 봐 친절하게 "옛날처럼 받을 임금을 다 받다가 문제가 생기면 정부지원을 받는 일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세계 경제위기 속에서 정부가 은행의 지급보증에 나선 데에 따른 대가라고 인식했는지, 은행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대통령에게 결연한 의지가 잘 전달되도록 '성명서'를 채택했다. 물론 '대통령의 말 한마디 때문에 은행이 마치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되고 있다'는 익명의 볼멘소리도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지만 그다지 신경 쓸 수준은 아니었다. (은행장들의 성명서에 담긴 '해외자산 매각' 등 자구 노력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한 건, 지난 6일 강만수 장관이 시중은행장들을 불러놓고 주문했던 내용이다. 뒤늦게나마 대통령의 주문에 응답하면서 패키지로 장관의 주문에까지 모범답안을 제출한 셈이다.)

물론 지난 3월 기획재정부와 국토해양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220대가 다니는 톨게이트에 직원 12~14명이 근무하고 있다"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공무원들이 총동원돼 샅샅이 뒤졌지만 '실패'한 사례로 남았다. 그래도 대통령의 말 한마디의 위력은 톨게이트 발언에서도 유감없이 증명됐다. 대다수 언론들까지 검찰 수사하듯 톨게이트 현장 검증에 나설 정도였으니 두말할 필요가 없다.

'대불산단 전봇대'나 '은행 임원들의 고임금 삭감' 등은 시비 걸 일은 아니다. 박수를 쳐야 할 일이다. 물론 전후 상황과 인과 관계를 따지면, 시빗거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액면 그대로만 보면 옳은 이야기고 맞는 지적이다. 때로는 지켜보는 이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한다.

대통령과 청와대에 바라는 작은 소망

문제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항상 '모범정답'으로만 결론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본인의 의도와는 달리 정반대의 효과를 낳기도 한다. 21일 은행들의 자구노력을 강조했던 국무회의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현재의 한국 경제위기가 "총괄적으로 IMF 위기 때보다 심각하다"고 말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IMF 때와는 다르다"며 줄곧 '낙관론'을 펴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IMF 위기 때보다 심각하다"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이번에는 시장이 움직였다. 21일 환율은 상승하고 주가는 내려갔다. 이러한 흐름은 22일 오전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뜩이나 불안정한 시장 상황에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영향을 주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대통령과 외교관은 가급적 '극단적인 단어 사용'을 자제하는 것도, 말 한마디가 미치는 파장이 적잖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말 한마디에 따라 상황이 반전되거나 돌변하는 경우도 있다.

이 대통령의 'IMF 발언'이 더욱 심각한 건, 그 이전까지 일관되게 반대 방향에서 낙관론을 펴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난 2일 여야 원내대표단과의 만찬 회동에서는 "정치 지도자들이 불안감을 부추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까지 했다. 세계 금융위기의 파장 때문에 한국 경제 상황이 매우 안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대통령이 오락가락한 발언을 할 정도로 경제상황이 예측불가하거나 심하게 변동되지는 않았다. 강만수 장관의 뒤죽박죽 발언으로 혼란스러워하는 시장에 대통령이 기름을 끼얹어 더욱 불신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는 셈이다.

얼마 전까지 청와대는 <파이낸셜 타임스>가 의도적으로 한국 경제위기를 부추긴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공식적인 반박성 해명 보도자료를 뿌리기도 했다. <파이낸셜 타임스>가 있지도 한국의 경제위기를 부풀리는 의도가 무엇이냐며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21일 이 대통령의 "IMF 위기 때보다 심각하다"는 발언을 보며 <파이낸셜 타임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어떤 보도를 할까.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할 바에는 말이라도 아꼈으면 좋겠다. 대통령과 청와대에 바라는 작은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