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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한향란 10월14일 서울 중구 장교동 서울종합고용지원센터에서 한 실직자가 구직자들이 적어놓은 ‘취업 희망메모’를 보고 있다. |
“저…, <시사IN>이라는 시사 주간지 기자인데요….”
10월14일 오후 서울 중구 장교동 서울종합고용지원센터. 실업급여 신청과 구직을 위해 센터를 찾은 실직자들은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나같이 자리를 피했다. “죄송합니다. 다른 사람하고….” “뭐 좋은 일이라고 인터뷰를 합니까. 별로 할 말이 없네요.”
어렵사리 취재에 응한 강 아무개씨(28·웹 프로그래머)는 경기 악화로 소속 팀이 해체되면서 지난 9월 말 권고사직을 당했다고 말했다. “실업급여를 신청하러 왔다. 바로 새 직장을 구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을 갖고 좀더 신중하게 선택하려 한다. 아직 젊으니까 일할 만한 곳이 꽤 있을 것이다.”
그래도 실직 전 임금의 50%(실업급여)를 앞으로 석 달 동안 받게 되는 강씨의 경우는 그나마 행복한(?) 편이었다. 서울 용산전자상가에서 13년 동안 컴퓨터 부품 판매업을 해오다 최근 사업을 접었다는 김 아무개씨(44)는 고용보험 가입자가 아니어서 당장 생계가 걱정이었다. 자영업자는 ‘임의가입’ 대상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워낙 영세한 곳이 많아 실제 가입자가 극히 미미한 상황이다. “매출이 5년 전의 15% 수준으로 떨어졌다. 빚 갚느라 울며 겨자 먹기로 해왔지만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짜리 애도 있는데 뭘 해먹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이 나이에 어디 취업을 하기도 어렵고….”
비정규직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비정규직의 고용보험 가입률은 올해 3월 기준으로 고작 33%밖에 되지 않는다. 전체 임금노동자(55.6%)와 정규직(81.7%) 가입률에 한참 못 미치는 수치다. 단순 사무 계약직으로 일하다 지난 8월 해고돼 새 일자리를 찾고 있는 최 아무개씨(38)는 이렇게 토로한다.
“3년 전엔 그래도 정규직이라 실업급여를 받았지만 이번에는 그런 것도 없다. 처자식 안 굶기려면 무엇이든 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 일, 저 일 닥치는 대로 해오면서 특별한 전문성을 쌓지 못했다. 인정될 만한 경력이 없다. 무슨 일을 하든 ‘신입’으로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경기가 좋지 않은 데다, 주위에 젊고, 학력 좋고, 능력 뛰어난 사람이 수두룩한 판국에 과연 나 같은 사람을 써줄 곳이 있겠나.”
실업급여 받는 사람은 그나마 행복?
전세계적 ‘감원 태풍’이 우리나라에도 상륙할 조짐이다. 자동차·반도체·조선 등 주요 업종에서 구조조정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으며, 폐업을 하거나 고려 중인 중소기업도 갈수록 늘어난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 9월23~24일 제조업체 154곳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미국발 금융위기가 장기화할 경우 대응 방안(복수 응답 가능)으로 ‘초긴축 경영’(68.6%)을 가장 많이 꼽았고, ‘신규 채용 중단·감원’(26.8%) ‘대안이 없거나 휴·폐업을 고려하겠다’(23.5%)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민주당 환헤지피해대책위원회는 9월19일 “키코(KIKO, 통화옵션상품) 피해를 본 중소기업이 519개에 달한다. 이들 기업에서 구조조정이 일어나면 5000여 명이 한순간에 일자리를 잃게 되고 부양가족(4인 기준)까지 더해 2만여 명이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이렇게 한순간에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다. 바로 새 직장을 구하면 천만다행이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 고용지원센터를 방문해 짧게는 3개월, 길게는 8개월 동안 지급되는 실업급여에 의존하면서 ‘재활’을 모색해야만 한다. 그런데 만일, 이후에도 별 뾰족한 수가 생기지 않는다면 과연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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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10월8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일자리 박람회’를 찾은 이명박 대통령. |
1997년 외환위기 때를 떠올려보면 그 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수많은 사람이 거리로 내몰렸고 가정은 파괴되었으며 자살과 범죄가 폭증했다. 2003∼2005년 3년 동안 빈곤층의 동향을 조사·분석한 자료도 참조할 만하다. 이 연구에 따르면, 전체 가구의 35.3%가 빈곤을 경험했는데 이 중 90% 가까이가 일시적 또는 반복적 경험 가구였다. 이들 계층은 실직이나 저임금·비정규직 고용, 자영업의 구조조정 등 고용과 소득의 불안정 때문에 수시로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한 국가·사회적 차원의 대비책, 즉 ‘사회안전망’의 중요성이 최근 새삼 강조되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지난 정부에서 10여 년 동안 힘을 쏟아온 핵심 정책은 고용지원센터의 설립과 확대·강화였다. 현재 전국 81곳에서 운영 중인 고용지원센터는 과거에 비해 규모 면에서 크게 개선됐을 뿐만 아니라 구직자 수, 취업률, 직업훈련자의 재취업률 등 구체적 실적도 나날이 상승 추세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사회안전망은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우선 앞서 언급한 대로 고용보험 가입률이 낮은 것부터 심각한 문제다. 독일·프랑스·오스트리아·네덜란드 등 유럽 선진국은 보험 가입과 상관없이 지원하는 ‘실업 부조’ 정책이 따로 있지만 우리는 미가입자의 경우 별다른 대책이 없다.
실업급여의 수준 역시 매우 미흡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실업급여는 거의 유일한 실질 사회안전망이라 할 수 있지만 수급 자격, 지급 기간, 액수에서 주요 선진국과 너무 차이가 난다”라고 지적한다. 우리나라는 비자발적 실업자에게만 실업급여를 지급하지만 대다수 다른 나라는 그렇지 않다. 자발적 실직자나 징계 해고자도 일정 기간 유예를 둔 뒤 지급한다. 3~8개월 정도인 지급 기간도 최소 1년 이상인 스웨덴·프랑스·네덜란드·덴마크에 비해 짧다. 액수 역시 우리는 퇴직 전 월급의 50%에 한도(하루 4만원)까지 있는 반면, 덴마크는 한도 없이 90%를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김 소장은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과연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라고 꼬집는다.
고용지원센터의 또 다른 주요 업무인 취업 알선과 직업훈련도 ‘형식적’이라는 비판이 많다. 이병희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의 말이다. “실직자가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기 위해선 초기 진단·심층 상담과 세심한 사후 관리·지원이 필요하지만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직업훈련도 마찬가지다. 당사자에게 과연 훈련이 필요한지, 어떤 훈련이 적합한지 전문 상담원의 ‘개입’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지금은 개인이 원하면 아무 훈련이나 받을 수 있다. 요리·미용·워드 프로세스를 배우면 취업이 잘 될까? 이미 시장에서 포화 상태 아닌가? 지극히 회의적이라 본다. 오직 훈련수당을 받기 위해 신청하는 사람도 상당수 있다고 안다.”
이 연구위원은 문제의 원인으로 ‘미흡한 투자와 인프라’를 꼽았다. 더 나은 서비스는 더 적극적인 예산 지원과 인력 배치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우리나라는 2005년 현재 GDP 대비 공공 고용서비스에 대한 지출이 0.03%로 OECD 21개국 가운데 최하위에 머무른다. 이는 OECD 평균(0.2%)의 15%밖에 안 되는 수준이다.
더 큰 문제는 이명박 정부다. 열악한 현실을 타개하기보다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쪽으로 고용 정책이 흘러간다. 출범 초기 고용지원센터를 각 지방자치단체로 이양한다는 계획을 세웠다가 “서비스의 전문성을 후퇴시킬 것이다”라는 관련 단체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중단한 바 있는 정부는, 10월8일에는 사회적 일자리 예산과 고용지원센터 운영 예산을 삭감하는 계획안을 발표해 빈축을 샀다. 대신 취업지원 민간위탁 운영 예산은 대폭 늘렸는데, 이에 대해 노동부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염려한다.“현 정부는 고용지원센터에서 하고 있는 취업 알선 등의 업무를 민간에 상당 부분 넘기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이는 고용서비스가 상업화·시장화되어 사회적 약자의 일자리 찾기에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민간 업체들은 어쨌든 돈 되는 쪽으로만 움직이지 않겠나? ‘제휴’나 ‘협력’이면 몰라도, 공공과 민간의 역할은 분명히 구별·정립되어야 한다.”
고용지원센터 예산 삭감한 이명박 정부
지난 정권에서 고용 정책에 관여했던 한 노동문제 전문가도 “고용 정책이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모든 것을 시장에 내맡기려 한다”라고 정부를 강력히 비판했다.
“원래부터 오직 성장을 해야만 일자리가 생긴다는 노선 아니었나. 일자리는 노동부가 아니라 기획재정부가 챙긴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현 경제위기 상황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듯, 전혀 현실성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성장 자체의 가능성도 매우 희박해졌다. 최악의 상황을 보완할 특단의 고용 정책이 절실하다고 본다. 시장을 통한 해결책은 너무 제한적이다. 고용지원센터의 역할과 기능을 강화하는 등 국가 차원에서 적극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
10월7일 이영희 노동부 장관은 “최저임금이 우리 경제 수준에 비해 가파르게 올라갔다”라고 밝혀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시급 4000원(2009년 1월부터 적용)에 불과한, 저임금 노동자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주기 위해 만든 이 제도마저 기업의 요구에 맞춰 손질할 의사를 내비친 셈이다. 그런데 만일 최저임금이 ‘개악’될 경우 그 피해는 또한 실직자에게도 돌아갈 수밖에 없다. 실업급여의 하한선이 최저임금의 90%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실직자에게는 ‘고난의 시절’이 찾아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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