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의 몰락과 함께 민주공화정이 세워졌지만 이후 등장한 독재권력은 이 소중한 유산마저 멋대로 짓밟았다. 박정희는 유신정권 수립 직후 역사 교과서를 사실상 정권이 기록하고 정권이 감수하는 국정체제로 전환했다. 쿠데타를 정당화하고, 개발독재를 합리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사 교과서엔 삼국시대부터 조선조까지 장군의 역할이 특별히 칭송되고, 심지어 고려 때 쿠데타 세력인 무신정권이 긍정적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이런 국정체제가 바뀌게 된 것은 김영삼 대통령 때인 1997년이었다. 정부가 일정한 지침을 제시하고, 기준에 맞으면 교과서로 인정하고, 각 학교가 알아서 선택하도록 하는 검인정 체제를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정치권력이 역사를 재단하고 가르치는 원시적 체제라는 비난에서 탈출하는 게 우선이었겠지만, 다양한 관점과 해석을 제공해 창의적인 역사교육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는 교육계와 역사 연구를 정권이 제약해선 안 된다는 학계의 오래된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물론 정부나 교육계 학계는 시장이 교과서의 옥석을 가릴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출범하자마자 난데없이 수구적 언론·재계·관변학계 등과 총동원 체제를 짜 역사 왜곡에 나섰다. 관철하고자 하던 ‘역사관’이 워낙 편협되고 무지하며 정치적이었던 터라 자신의 금과옥조인 자유시장 경쟁의 원리까지 짓밟았다. 교과부가 시도 교육감의 팔을 비틀고, 출판사의 팔을 비틀고, 필자의 팔을 비틀었던 것이다. 교과부만으로 성이 안 차자 대통령까지 직접 나섰고, 결국 끝까지 거부하던 금성출판사도 손을 들었다. 사실상 국정 교과서로 돌려버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헌법이 규정한 교육의 자주성과 정치적 중립성은 휴짓조각이 되었다.

이런 강짜가 독재정권의 적자인 수구세력의 집권을 강화하려는 것임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런다고 역사를 되돌릴 순 없다. 문제는 국가적 손실이다. 당장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왜곡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