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나오지 그랬니" 펌 01-31 22:53
무직자 미네르바여 서울대 나오지 그랬니 황혼녘에 날아오른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한국인 가슴속 예민한 곳을 날카롭게 할퀴고 지나갔다. 부엉이의 발톱은 학벌주의·상류층 지향, 전문가 맹신 등 한국인 가슴속에 곪아 있는 생채기를 새삼 들쑤셨다. [71호] 2009년 01월 17일 (토) 02:47:33 이오성 기자 dodash@sisain.co.kr     ⓒ뉴시스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왼쪽)은 신정아씨 사건과 미네르바 사건을 동일시했다. 하지만 많은 누리꾼은 서울신문 만평(오른쪽)처럼 박씨가 명문대 출신이었다면 대중의 반응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문대 출신 30대 무직자’라는 수식은 어느새 미네르바를 설명하는 엄중한 ‘헤드 카피’가 되었다. 학벌·나이·경력 등 한국 사회가 가장 중요시하는 ‘스펙’에서 탈락하면서 사이버 논객 미네르바가 아닌, ‘자연인’ 박 아무개씨는 순식간에 평범한 존재로 전락했다.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은 박씨 체포 직후 ‘미네르바와 신정아의 가면무도회’라는 글에서 “미네르바도 신정아씨도… 끝없이 거짓과 근거 없는 헛소문을 생산했다. 그들은 아마도 스스로 예일대 박사라고, 온라인 경제 대통령이라고 믿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정아와 박씨의 ‘학벌 부풀리기’를 동일시함으로써 대중의 공분을 이끌어낼 작정이었으리라. 하지만 전 의원의 생각과 달리 대중의 반응은 신정아 사건 때와 사뭇 다르다. 오히려 학벌주의에 대한 성찰이 비등하다. 예컨대 많은 이들은 미네르바가 명문대 출신이었다면 언론의 반응이 달랐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블로거 ‘준인’은 “미네르바가 서울대 공대를 나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럼 신문 기사 제목이 ‘서울대 공대 출신 박씨, 비전문가로서 뛰어난 식견 드러내’쯤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최소한 ‘속았다’라고는 안 썼을 것이다”라고 꼬집었다. 소설가 이외수씨도 MBC 라디오 <이외수의 언중유쾌>에서 “가방 끈 짧은 주제에 아는 것이 너무 많은 죄, 이것이 미네르바에게 씌워진 또 하나 죄는 아닐까 생각해본다”라고 일갈했다. 미네르바가 서울대 출신이었다면 ‘학벌 좋은’ 이들도 박씨를 거들고 나섰다.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도시건축가 김진애씨는 “(박씨의) 학벌·직업 등을 거론하는 데에는 ‘아마추어에 놀아났다’며 인터넷 논객을 불신하게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학벌만은 거론치 말라”고 지적했다. 하버드 대학 박사 출신인 유종일 교수(KDI 국제정책대학원·경제학)도 한겨레에 기고한 글에서 “글의 내용과 논리만을 보고 판단해야지 그의 학력을 문제 삼아 ‘속았다, 우롱당했다’ 운운하는 것은 천박함의 극치다”라고 비판했다.  왜 사람들은 신정아 사건 때와 달리 박씨에게 관대한 것일까. 우선 박씨 스스로 항변했듯 경제 전문가 ‘사칭’으로 그가 사사로운 이익을 취했는지 ‘아직’ 알려진 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론이 박씨를 편드는 가장 중요한 까닭은 한평생 학벌 콤플렉스에 시달려온 수많은 이가 그에게 ‘동병상련’의 심경을 느껴서이다. 이러한 심경은 곧 박씨가 ‘진짜’ 미네르바이기를 바라는 ‘믿음’으로 발전했다. 한 누리꾼은 아고라 토론방에 ‘미네르바, 진짜여야 한다’라는 글에서 “박씨가 미네르바라는 것은 학벌이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실례다. 좋은 학교 못 가도 독학으로 어려운 경제 문제에 탁월한 식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누리꾼도 “박씨가 진짜 미네르바라는 게 입증되는 순간 우리 사회의 학벌 지상주의가 조금 나아지지 않겠느냐”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체포된 박씨 역시 이런 학벌주의에 염증을 느꼈다. 1월13일, 박씨는 박찬종 변호사를 거쳐 이렇게 불만을 토로했다. “학벌이 온라인에 의견 표시하는 데 제약이라도 되나? 온라인 블로거 중 현직 프로보다 식견 높은 블로거가 많다. 앞으로 온라인에 의견을 표시하려면 최종 학력과 직업을 쓰고 글을 게재하도록 관련법을 개정하는 건 어떤가?” 눈길이 가는 대목은 ‘진짜’ 미네르바 역시 지난해 9월 작성한 글에서 학벌주의를 지적했다는 점이다. “많이 배우고 안 배우고, 대학이고 박사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어. 한마디로 시스템적 사고 틀 속에서 상황 파악을 하고 안 하고가 가장 결정적인 차이라 이거지… 결국 그 차이를 그럴싸한 포장지로 뒤집어씌운 게 학위고 학력이고… 이런 포장지는 나중에 인사부에서 책임 회피용으로 그만이거든. ‘설마 그럴 줄 몰랐어요’ 얼마나 간단하냐고. 그러니까 (학벌을) 안전장치로 여겨 더 집착하게 되는 거야.” 미네르바도, 아고라도 학벌주의에 사로잡혀 체포된 박씨가 미네르바가 맞다면, 그 역시 우리 사회의 학벌주의·간판주의에 적잖은 콤플렉스를 가졌으리라 추측하게 하는 대목이다. 결국 박씨가 자기 학벌을 부풀린 건 스스로 콤플렉스에 빠져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씁쓸한 것은 미네르바를 추앙한 이들조차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체포 직후 아고라 토론방 등에는 박씨가 가짜 미네르바라는 음모론이 고개를 들었다. 이들은 모두 박씨의 학벌·간판과 상관없이 박씨에게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다고 주장하지만, 일부 누리꾼에게 일종의 ‘인지 부조화’ 상태가 엿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미네르바를 고작 전문대 졸로 폄훼하지 마라’ ‘그런 정보와 지식은 독학으로 절대 알 수 없다’ 따위의 주장이 그렇다. 블로거 ‘MP4/13’는 이런 음모론에 대해 “감히(?) 전문대 출신 30대 무직자가 대한민국 0.1% 상류층으로서 미국 금융계에서 활약한 미네르바 신화를 깨선 안 된다는 욕망이 음모론을 일으키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이런 학벌주의가 우리 사회에 ‘포퓰리스트’의 등장을 용이하게 하리라는 분석도 있다. <88만원 세대>의 공동 저자 박권일씨는 “미네르바가  만일 서울대 정도의 학력, 적절한 사회적 경력, 최장집 교수가 말하는 ‘카리스마’를 갖추었다면 그는 체포되기는커녕 다음 대선을 준비하지 않겠나. 대중 스스로 저런 조건들을 깨부수려 하기보다는 ‘학벌과 경력을 갖춘 진짜 미네르바’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2009년 벽두에 하늘로 날아오른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그렇게 한국인의 가슴속 예민한 곳을 날카롭게 할퀴고 지나갔다. 그것은 어쩌면 미네르바가 ‘학벌 공화국’ 대한민국에 던지는 경고 메시지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