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백'은 사회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다.'설마설마' 하던 지지자들은 망연자실했고 그의 도덕성 만큼은 인정했던 국민도 갑작스런 '배신'에 말문을 열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은 왜 자신의 마지막 보루였던 도덕성의 훼손을 감수하고 스스로 혐의를 인정했을까.
↑ 노무현 전 대통령이 7일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이 부인 권양숙 여사라고 밝혀 파문이 커지고 있다. 사진은 노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5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자택 앞에서 형 건평씨의 구속에 대해 입장을 밝히는 모습. 왕태석기자 kingwang@hk
노 전 대통령이 7일 자신의 홈페이지 '사람사는 세상'에 띄운 글의 핵심은 그 중간 부분에 있었다.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박 회장한테서 받은 것으로 알려진 수억원에 대해 "사실은 '저의 집'에서 받은 것"이라고 밝힌 부분이다.
노 전 대통령측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저의 집'이라는 표현은 부인인 권양숙 여사를 이르는 말이다. 권 여사가 정 전 비서관을 통해 박 회장의 돈을 받아 사용했다는 의미다. 돈을 받은 시점이 2005~2006년으로 노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인 만큼 법적으로 문제가 될만한 행위다.
의문은 이 같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노 전 대통령이 왜 스스로 권 여사의 자금수수 사실을 미리 실토했느냐는 데 모아진다. 정치권과 법조계에서는 우선 노 전 대통령 특유의 직설적 성격 때문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현직에 있을 때 문제를 감추거나 우회하려 하기보다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밝히는 정면돌파 전략을 자주 사용했다. 퇴임 직후 불거진 국가기밀유출 의혹 때도 "검찰에 나가 조사를 받겠다"고 먼저 밝히는 등 그다운 면모를 보였다.
노 전 대통령은 사과 글에서 정 전 비서관이 지금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는 점을 언급한 뒤 "혹시 정 비서관이 자신이 한 일로 진술하지 않았는지 걱정이다"고 이 글을 올린 배경의 일단을 드러냈다.
어쩌면 정 전 비서관이 검찰 조사를 받기 전 "문제의 돈은 내가 받은 것으로 하겠다"라고 노 전 대통령을 설득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노 전 대통령의 성격상 이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었을 것이라는 게 그를 잘 아는 이들의 해석이다. 정 전 비서관이 덮어쓰는 모습을 보느니 차라리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자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반면 노 전 대통령의 자백을 달리 해석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정황상 검찰이 노 전 대통령이나 권 여사가 박 회장 돈을 받았다는 물증을 확보했고, 이 같은 상황이 최근 노 전 대통령측에 알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끝까지 진실을 숨기고 있다가 검찰 등 제3자에 의해 폭로될 경우 노 전 대통령은 정치적, 도덕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된다. 정 전 비서관에 책임을 미룬 사실까지 밝혀지면 노 전 대통령은 엄청난 비난에 직면할 수도 있다. 외통수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차라리 먼저 자백하는 편이 떳떳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외견상 자백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자백이 아니라는 해석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은 돈을 받은 주체가 자신이 아닌 권 여사라고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이 돈을 받았다면 명백한 불법 정치자금 또는 뇌물 수수에 해당하지만 부인의 경우에는 상황이 다소 복잡해진다. 경우에 따라 처벌을 면할 가능성도 있다.
'권 여사의 수억원'을 희생하는 대신 '연씨의 50억원'을 희석하려 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사과글에서 권 여사의 금품수수 사실은 시인했지만 문제의 50억원에 대해서는 자신과 관련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