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스트리트는 리먼브러더스의 파산과 세계 금융위기의 교훈을 무시하고 있다. 미국의 납세자들은 월스트리트의 타락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9월 중순 리먼브러더스 파산 1주년 기념 연설에서 미국의 금융 중심지 월스트리트를 맹렬히 비난했다.
미국 최고 권력자가 월스트리트의 금권력(金權力)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를 솔직히 토로한 것이다. 지금 백악관은 월스트리트의 로비스트, 이와 내통한 민주·공화당 의원, 심지어 행정부 내부의 ‘제5열’(월스트리트 출신의)로 구성된 동맹군으로부터 집중 포격을 당하고 있다. 이 ‘동맹군’의 목표는, 금융규제 개혁안을 산산조각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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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이 국회의사당에서 항의 중인 시위대에 둘러싸여 질의에 답하고 있다. |
미국 대형 금융기관들의 잘못된 행태가 세계 금융위기를 불렀다는 것은 더 이상 논란 대상이 아니다. 금융기관들은 지나치게 많은 외부 자금을 빌려(심지어 자기자본의 30배) 위험하기 짝이 없는 투자를 일삼았다. 해당 상품의 설계자 이외에는 누구도 그 내용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금융상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 금융 소비자 처지에서는 원금 상환이 의심스러운 불량 상품을 속아서 구입한 것이다. 또한 미국 금융기관들은 신용평가기관과 결탁해서 이런 복잡하고 위험한 금융상품에 높은 신용등급을 부여받는, 사실상의 사기 행위를 저질렀다. 또한 처음에는 이자를 낼 필요가 없지만, 날이 갈수록 이자가 살인적으로 불어나는 엽기적인 대출상품을 개발해 가난한 시민에게 돈을 빌려주기도 했다.
“금융위기의 뇌관을 해체하라”
금융기관 경영자들은 매우 위험하지만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는 투자에 골몰했다. 손해를 보면 책임질 필요가 없지만, 수익을 내면 그중 상당 부분을 성과급으로 얻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성과급의 규모가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10만 달러 규모(수억원대)가 아니라 적어도 수백만 달러(수십억원대), 나아가 수천만 달러(수백억원대)에 이르기도 했다.
이런 세상을 유지하고 싶은 월스트리트에 대해 오바마 대통령이 제안한 핵심적 개혁과제는 ‘소비자금융보호청’ 신설이다. 이 기구의 주요 기능은, 상환능력 없는 금융기관들이 채권을 발행하여 시민들로부터 지나치게 많은 돈을 빌리는 일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 소비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하고 위험한 금융상품을 제한하고, 부동산 대출 및 신용카드 부문에서 너무 비싼 수수료와 이자를 막는 일도 소비자금융보호청의 몫이다. 오바마의 금융규제 개혁안 중에는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감독 권한을 강화해 대형 금융기관들이 너무 위험한 투자엔 뛰어들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항목도 있다. 금융기관 경영자에게 주어지는 지나치게 높은 보수를 제한하고, 파생상품을 함부로 출시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기도 한다.
월스트리트와 경영자들이 금융개혁에 반발하는 이유는 단순하지만 명확하다. 금융위기 이후, 구제금융(=납세자의 돈)으로 연명하면서도 누려온 ‘떼돈의 특혜’를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는 이처럼 뻔뻔스럽지만 너무나 강고하고 미국 사회 구석구석에 촉수를 뻗치고 있다.
구제금융으로 1800억 달러를 받은 거대 보험사 AIG는 지난 3월 임직원에게 보너스로 1억6880만 달러를 지급해 물의를 일으켰다. 금융위기의 ‘원흉’들이 처벌받기는커녕 국민의 돈을 챙긴 것이다. 대다수 미국인들의 격렬한 반발에도 AIG는 ‘의연하게’ 보너스를 지급했고, 내년 초에도 1억9800만 달러 규모의 보너스를 줄 계획이다. 이런 관행을 금지하는 금융개혁을 차단하기 위해 월스트리트가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정치권에 뿌린 로비 자금은 모두 2억2000만 달러 정도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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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부동산 대출금을 갚지 못해 집에서 쫓겨난 흑인 소녀의 모습이 애처롭다. |
월스트리트에서 거금 받은 가이트너 측근들
오바마 행정부의 ‘적’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10월 중순 발표된 공직자 재산공개서에 따르면,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의 자문위원들이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월스트리트 기업들로부터 수백만 달러씩을 벌어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자문위원 중 루이스 알렉산더는 씨티그룹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역임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올해 3월까지 씨티그룹에서 240만 달러를 받았다. 오바마 행정부의 ‘금융안정화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바 있는 매튜 카베이커는 거대 사모펀드인 블랙스톤 출신으로 이 회사에서 지난해 58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골드만삭스 로비스트 출신인 마크 패터슨은 이 회사로부터 지난해 63만7000달러를 수수했고, 뉴욕의 헤지펀드인 마리너 인베스트 그룹의 경영자였던 리 삭스는 지난해 이 회사로부터 3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가이트너 재무장관은 누구보다 소리 높여 금융개혁을 외쳐온 인사다. 그러나 그와 함께 구제금융 수천억 달러 집행을 감시하고 금융개혁을 주도해야 하는 자문위원들은, 반개혁 진영의 대형 금융기관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거액의 물질적 보상을 받아온 것이다. 미국 행정부의 인사 관행에 따르면 이런 인물들은 가이트너의 재무부에 들어가기 힘들다. 상원 인준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이트너 재무장관이 상원 인준이 필요 없는 ‘자문위원’(adviser) 형식으로 이들을 기용한 것이라는 의혹이 확산되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올해 안으로 금융규제 개혁과 관련된 법적·정치적 절차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그러나 월스트리트는 금권력으로 개혁에 저항하고, 금융개혁의 사령부인 재무부에는 월스트리트의 친구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수석 회계사를 역임한 바 있는 린 터너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바마가 약속한 투명성은 어디 있는가. 평범한 미국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이 오바마 행정부 어디에 있단 말인가.” |
peeker@sisai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