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이 가른‘북·중 대 한·미’ 전선 코스모스펀드 05-18 13:14
5월3~7일, 중국 정부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베푼 의전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김 위원장 일행이 이동하는 고속도로(톈진~베이징 간 120km)는 전면 통제되었다. 중국 경찰은 댜오위타이 국빈관으로 향하는 김 위원장을 위해 베이징 도심의 8차선 중 4차선을 완전히 비웠다. 다른 국가 원수의 방중에서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극진한 예우였다. 이런 예우는 중국이 지난 몇 년간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을 지속적으로 희망해왔고, 드디어 그 뜻을 이루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중국이 그토록 열렬히 김 위원장의 방중을 원한 까닭은 무엇일까. 김 위원장은 왜 하필 천안함 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지목되고 있는 시점에 중국을 방문했을까. 그리고 그의 방중은 한반도와 주변 정세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까. ⓒXinhua 5월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왼쪽)이 후진타오 주석(오른쪽)과 함께 베이징의 보아오 바이오테크 사를 방문했다. '김정일 방중'은 중국의 숙원 북·중 관계에 정통한 소식통들에 따르면, 중국의 대북 전략은 2004년 말쯤에 일대 변혁을 겪었다. 이른바 '중·조 일치화'. 조선(북한)과 중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일치시킨다는 의미다. 중국의 동북 3성(랴오닝·지린·헤이룽장)을 북한과 엮어 개발하는 50억 달러 규모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입안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이후 북한에서는 친중파로 분류되는 김정일 위원장의 매제 장성택이 노동당 행정부장으로 임명(2007년 10월)되고, 대남·대미 인맥이 점차 사라졌다고 한다. 장성택이 장악한 노동당 행정부는 정보기관·검찰·사법부를 총괄하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다. 이처럼 북한에서 친중파가 떠오른 시기는 남북 관계가 지속적으로 악화된 때와 겹친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직후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 정신을 지키자"라며 북한이 중시하는 6· 15 선언과 10·4 합의를 정면 부정하고, 김태영 당시 합참의장 후보자가 '선제 공격론'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을 내놓았던 때다. 더욱이 이명박 정부는 '남북 관계의 물길을 바로잡자'는 차원에서 '경제적 수단을 통해 북한의 행동 변화를 유인'하겠다는 지침을 가지고 있었다. ⓒ청와대 제공 3월30일 천안함 구조 현장에 있던 독도함에 승선한 이명박 대통령. 이 같은 상황에서 북한에 접근한 것이 중국이었다. 2008년 4월 시진핑 부주석은 박의춘 북한 외무상을 만난 자리에서 당시 의제였던 식량 지원을 '김정일 방중'과 슬그머니 연계시킨다. 그 직후에는 북한 주재 중국대사가 후진타오 주석의 구두 초청을 김 위원장에게 전달한다. 그러나 북·중 밀착을 우려한 미국이 일사천리로 대북 식량지원 협상을 마무리하면서 당시의 김정일 방중은 유야무야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이후 더욱 집요하고 압축적으로 김정일 위원장의 방북을 압박해왔다. 이런 움직임은 지난해 하반기에 집중되어 있다. 김정일 위원장은 2009년 9월 후진타오 주석의 친서를 접수했고, 10월에는 원자바오 총리를 접견했다. 10월 말에는 후진타오 주석이 방중한 조선노동당 대표단을 만나 김정일 위원장을 초청했다. 올해 2월에도 중국 공산당 왕자루이 대외연락부장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후진타오 주석이 북한 측과 "실무적인 협력을 강화할 것을 희망"하며 "편리한 시기에 중국을 방문할 것을 제의한다"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지난해 하반기는 방중 초청뿐 아니라, 중국이 북한과 동북 3성을 겨냥한 초대형 개발사업이 집중 입안된 시기이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2009년 7월1일 랴오닝 연해 경제벨트 계획을 국가전략으로 정식 비준했다. 다롄을 핵심으로 왼쪽으로는 발해 연안, 오른쪽으로는 단둥을 거쳐 신의주 등 북한 서해로 이어지는 대규모 개발계획이다. 이런 랴오닝 연해 경제벨트가 북한의 서해와 연계된다면 동해 쪽에는 장길도(長吉圖:창춘-지린-투먼) 개발계획이 있다. 이 프로젝트는 같은 해 8월30일 중국의 국가사업으로 비준되었는데 '두만강 지역 개발'을 사업계획 중 일부로 배치하고 있다. 장길도 벨트는 이 지역에서 생산한 상품을 북한의 동북부 극단인 나진항·청진항 등을 통해 동해로 수출할 수 있어야 발전이 가능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북한의 항만을 개발하고, 이곳으로 이어지는 철도·고속도로·교량 등 인프라에 투자할 필요가 생긴다. 이미 다롄의 창리그룹은 2008년 나진항 1호 부두의 사용권을 확보해둔 상태다. 이 외에도 지난해와 올 초 사이에 확정된 개발 계획으로는 △백두산 관광단지 개발 △압록강대교 신설 △압록강 섬인 황금평과 위화도에 대한 자유무역지구 개발 등이 있다. 어떻게 보면 중국은 지난해 7~9월에 동북지역 개발계획을 확정하고 이를 미끼로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을 요청해온 것이다. 이에 북한은 행동으로 화답했다. 지난해 12월16일 김정일 위원장은 나선시를 현지 지도한 데 이어 특별시로 승격시켰다. 올해 초에는 나선경제무역지대법을 투자자의 자유를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개정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움직임은 올해 초 조선국가개발은행을 설립한 것이다. 한국의 산업은행처럼 거대 국책사업에 투자하는 금융기관이다. 자본금은 100억 달러인데 이 중 90%를 북한 정부가 출자하게 되어 있다. 3월에 열린 조선국가개발은행 이사회에서는 '39호실' 실장 전일춘 국방위원회 대표가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에 대해 한 북한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비자금 담당인 39호실 실장을 이사장으로 삼았다는 것은 개발은행에 대한 김정일 위원장의 특별한 관심을 표현한 것이다. 다만 북한 정부의 출자금은 중국에서 차관을 받아 조달할 것으로 보이므로, 중국 측 입김이 향후 북한 개발에 크게 작용하리라 예상된다." 배종렬 한국수출입은행 선임연구위원은 "2002년부터 본격화된 중국의 동북 진흥 계획이 한 계단 더 심화되어 지속성을 띠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김정일 위원장의 의전 차량 수십 대가 베이징 도심을 통과하고 있다. 이날 중국은 8차선 중 4차선을 완전히 비우는 '전례 없는 예우'를 했다. 김정일이 중국 방문을 꺼린 이유 그러나 이토록 중국 수뇌부가 안달하는 동안 김정일 위원장은 문자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 중국의 '성의'에 화답하면서도 방중만은 자제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북한 특유의 자주의식과 함께 경제 종속에 대한 염려가 작용한 것으로 분석한다. 북한의 전체 대외무역 가운데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8년에 이미 73%에 달했다. 북한 체제의 존립 정당성 중 하나인 자립경제라는 슬로건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수준이다. 이에 비해 남북경협 규모는 2007년 17억9798만 달러를 기점으로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는 정체되거나 급감하는 추세다. 그래서 윤승현 옌볜 대학교 경제관리학원 교수는 "(2008년 당시에는) 북한은 심화된 북·중 무역관계 확대의 부담을 덜고자 남북경협을 적극 활용하고자 하는지도 모른다"라고 평가했다. 더욱이 북한이 남한에 손을 내민 징후도 있다. 한국기업인 (주)매리가 2009년 12월 나선특구에서 남북 합작기업 설립 승인을 받은 '사건'이 그것이다. 나선특구는 1998년 이후 10여년 동안 남한 기업의 직접 진출이 허용되지 않은 지역이다. 이에 대해 다른 북·중 관계 전문가는 김정일 위원장이 남북 정상회담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김정일 위원장 처지에서 방중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에서 받을 것은 있지만 내놓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남북 정상이 먼저 만나고 그 성과를 기반으로 중국에 가는 순서를 생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명박 정부의 결정적인 안보 실책 그렇다면 김정일 위원장이 5월3일 방중을 단행한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는 역설적으로 천안함 사건 때문으로 보인다. 중국이 북한에 가진 사활적 이해 중 하나는 한·미와의 갈등 고조를 방지하는 것이다. 엑스포 행사가 진행 중이고, 동북지역 개발을 가속화해야 하는 현 시점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천안함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고, 이에 따라 동북아의 긴장이 최근 10여 년 동안 보기 힘들었던 수위로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북한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사건이었고, 김정일 위원장은 이런 분위기를 타고 방중할 명분을 잡았다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이번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은 북한에 대한 중국 영향력의 대폭 강화로 귀결되리라는 것이 상당수 전문가들의 견해다. 천안함 침몰 사건이라는 비극의 다른 쪽에서 이루어진 북·중 간의 밀착은 '북·중 대 한·미'라는 새롭고 강력한 대립의 전선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대립 전선은 북한의 중국 영향권 편입을 불가피하게 하고,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 및 후계자 문제의 향방에 따라 의외의 '역사적 사변'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중국이 한편으로는 북한을 연계시킨 초대형 동북개발을 진행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자국의 역사적 영역을 청천강까지 확장한 최근의 사태(위 상자기사 참조)는 우연으로 보기에는 너무 공교롭다. 대한민국 헌법상 북한은 한국 영토의 일부이다. 이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장을 '허용'해온 것은 이명박 정부의 치명적 안보 실책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이종태 기자 / peeker@sisain.co.kr - 정직한 사람들이 만드는 정통 시사 주간지 < 시사IN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 시사IN 구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