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는 세계 각국에 주재하는 미국 외교관들의 정보 수집 내용이 들어 있어 가뜩이나 외교분야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오바마 행정부를 더욱 더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미국 국무부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비롯한 유엔 고위급 인사들에 대한 사찰을 해왔다는 사실도 폭로 문건을 통해 드러났다. 한국 정부가 지난해 가을 초에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북한과 접촉했다는 김성환 전 외교안보수석의 발언 내용도 들어 있다. 이와 관련해 이탈리아의 프랑코 프라티니 외무장관은 "세계 외교가의 9.11테러 사건"이라며 "국가간 신뢰도 크게 훼손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어샌지는 그동안 이라크 전쟁에 관한 미군의 기밀문건 등 폭발력이 큰 문건들을 공개하며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다음은 시사IN 164호에서 소개한 어샌지 관련 기사다. (편집자 주)
“그는 각국 정부, 특히 미국 정부에 도전하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다.” 1971년 미국의 베트남 전쟁 결정 과정에 관한 진실이 담긴 기밀문서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한 대니얼 엘스버그(79)가 세계적인 내부 기밀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WikiLeaks)’ 창설자이자 편집인인 줄리언 어샌지(39)를 지칭한 말이다. 이 같은 발언은 어샌지가 때마침 약 40만 건에 달하는 이라크 전쟁에 관한 미군의 기밀문서를 미국 <뉴욕타임스>, 영국 <가디언>, 독일 <슈피겔> 등 세계 유수 언론에 공개해 국제적 파장을 일으킨 직후에 나왔다.
엘스버그는 지난 10월23일 어샌지가 미군의 이라크 전쟁 기밀문서 폭로를 위해 영국 런던에서 연 기자회견에 참석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에서 일부러 날아왔다. 어샌지와 엘스버그는 이날 회견에서 이례적으로 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기밀문서 유출자를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엘스버그는 특히 “위키리크스 창설자인 어샌지가 3개 대륙에 걸쳐 서방 정보기관의 추적을 받고 있다”라고 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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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uter=Newsis 미국 정부는 도망자 신세인 어샌지(위)의 무차별 폭로를 무한정 좌시하지는 않을 듯하다. 그러나 10월 말 현재 아직 ‘체포 카드’를 꺼내지는 않았다. | ||
엘스버그가 지적한 대로 어샌지는 지금 미국 정부의 추적을 받는 요주의 인물이다. 어샌지는 미국 국방부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10월22일 <뉴욕타임스> 등 유력 매체를 통해 미군의 이라크 전쟁 관련 치부를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폭로 내용에 따르면, 미군이 부인해온 것과 달리 2003~2009년 살해된 이라크인이 10만9000명에 달하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이라크 민간인이라는 점을 미군은 파악하고 있었다. 또 이라크 보안군이 자국민에 대해 저지른 가학 행위는 물론이고 이란이 이라크 소수 정파인 시아파를 지원하고 있다는 점도 이번 문건을 통해 새롭게 밝혀졌다. 미국 국방부는 문제의 기밀문서 공개를 ‘테러 조직들에 주는 선물’이라 지칭하며, 이것이 “미군과 연합군 파트너, 이라크인과 아프간인 협조자들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라고 유감을 나타냈다.
미국 국방부가 어샌지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손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다는 점은 곳곳에서 읽힌다. 어샌지를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앞으로도 계속 폭로 문건이 이어져 미국 정부의 신뢰를 추락시키고, 아프가니스탄 테러 전쟁에도 치명상을 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샌지는 이번에 공개한 기밀문서 약 40만 건과는 별도로 1만5000건에 달하는 더 민감한 기밀을 추가로 공개하겠다고 천명한 상태다.
주무 관청인 미국 법무부는 아직까지 어샌지의 형사소추에 관한 어떤 공식적인 발표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국방부와 법무부는 어샌지가 지난 7월 미군의 아프간 전쟁에 관한 기밀문서 7만7000쪽을 폭로한 직후 형사소추 가능성을 탐색하는 내사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에도 어샌지는 <뉴욕타임스>를 비롯해 영향력 있는 3대 매체에 이를 공개함으로써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부 문건 절취 혐의로 기소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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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Photo 브래들리 매닝 일등병. | ||
물론 어샌지는 ‘정당하지 않은’ 정부의 비밀과 은폐를 파헤쳐 국민의 알 권리를 보호해주는 것이 위키리크스의 목적이기 때문에 이런 미국법 위반 운운 주장에 공감하지 않는다.
현재 미국 수사 당국이 주목하는 대목은 위키리크스가 특정 미국인에게 기밀문서를 제공하도록 조장하거나 부추겼느냐 여부다. 이 점을 입증할 경우 어샌지에 대한 형사소추는 그만큼 쉬워진다. 진보단체 ‘미국과학자연합’의 정부기밀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스티븐 애프터굿은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만일 위키리크스가 비밀 문건 제공을 적극 권유했다면 미국 정부는 위키리크스를 음모 단체로 주장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위키리크스가 확립된 언론 단체가 아닌 만큼 미국 수사 당국이 전통적인 언론매체에 주어지는 취재와 보도 특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관측한다. 그러나 위키리크스는 2008년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로부터 뉴미디어상을 받은 데 이어, 지난해 국제앰네스티가 위키리크스를 인권 부문 보도 기관상 수상자로 발표해 사실상 언론매체로 인정받은 상태라 볼 수 있다.
현재 미국 육군 수사 당국은 지난 7월 아프간 전쟁에 관한 기밀 문건 폭로와 관련해 브래들리 매닝 일등병을 기소했다. 바그다드 주둔 미군기지에서 근무하던 매닝 일병은 군사 기밀 15만여 건과 바그다드 한복판에서 일단의 민간인들을 미군 헬기가 공격해 11명 사망자를 낸 장면이 담긴 비디오를 위키리크스에 유출한 혐의를 받고 있다. 미국 정부가 위키리크스의 기밀 유출 사건과 관련해 기소한 사람은 매닝 일병이 유일하다.
문제는 과연 미국 사법 당국이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의 어샌지를 미국 법에 따라 처벌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미국 중앙정보국의 법률 고문을 지낸 제프리 스미스 변호사는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어샌지가 승인 없이 군사 기밀 정보를 취득했다면 방첩법에 따라 기소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현재 도망자 신세인 어샌지가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인 데다 위키리크스가 미국 내 아무런 조직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들어 처벌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만만치 않다. 1917년 발효한 방첩법은 어샌지처럼 미국법을 어긴 비(非)미국인에 대해서도 처벌의 손길이 미치고 있어, 미국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형사소추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가 다른 역대 행정부와 달리 불필요하게 기밀로 분류된 정보에 대한 공개를 적극 주창하고 실천해온 만큼, 과연 어샌지에 대해 형사소추라는 극단적 카드를 꺼낼지는 미지수다.
미국 정부가 어샌지의 무차별 폭로를 무한정 좌시하지는 않겠지만, 아직까지 국제적 형사 공조를 통한 ‘어샌지 체포’ 카드를 꺼내지 않은 것은 여러 해석이 나온다. 다만 미국 정부가 어샌지에 대해 추가로 기밀을 폭로하지 말 것과 현재 수중에 있는 자료 일체를 넘겨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기 때문에 그 결과에 따라 추후 어떤 행동을 취할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