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겼습니다.

“임금님은 가래바지니라.”

영조가 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고산영감은 선문답 같은 한 마디를 던졌다. 어리둥절했지만 이런 선문답은 처음이 아니었으므로 되묻지는 않았다. 되묻지 않아도 해답이 곧 나오게 되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산영감은 담뱃대를 빨면서 덧붙였다.

“가래바지는 밑이 타져 있어서 앉기만 하면 저절로 벌어지게 돼 있다. 임금님이 뒷간에 가시면 시녀들이 앞뒤에서 걷어 올리기만 하면 되느니라. 똥틀은 또 의자처럼 생겨서 푹신하게 털로 덮여 있지. 뒤를 다 보시면 시녀가 부드러운 수건으로 닦아 주고 따뜻한 물로 씻어 주느니라.”

참말인지 꾸며낸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참말이라면 임금님이란 자리도 어지간히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시녀라도 여자는 여자인데, 글쎄 그 여자가 지켜보고 있으니 똥이 나오다가도 도로 기어들어가겠다. 더구나 그 더러운 곳을 섬섬옥수로 씻고 닦고 하다니.

“무척 불편하셨겠습니다.”

하니까 영감은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 그저 임금님 우에 더한 게 없느니라. 그런 호강이 천상천하에 또 어디 있겠느냐?”

하긴 어릴 때 영조도 그런 바지를 입은 기억이 있다. 급할 때 멜빵을 벗고 어쩌고 하다가는 실수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가랑이 밑을 타 놓았는데 크고 작은 일을 볼 때 그렇게 편리할 수가 없다. 앉으면 그대로 총천연색으로 들어나고 서면 감쪽같이 사라지니 말이다. 어릴 때는 그래도 귀엽기나 하지 다 큰 흉물스런 물건이 앉고 설 때 마다 마음대로 출몰한대서야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런 불편한 호강을 지상 최고의 영화로 치고 있는 것이다. 역대 임금들이 단명했던 이유를 알만 했다. 그러나 소나기가 쏟아져도 뜀박질을 하지 않는 것을 양반의 체통으로 믿고 있는 고산영감이니 영조와는 시대감각이 고대와 현대만큼 차이가 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선문답 다음 순서는 으레 바둑이었다. 학교에서 퇴근만 하면 시도 때도 없이 불리어 가서 선문답을 해야 하고 바둑 상대를 해야 했다. 집안 어른일 뿐만 아니라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고을살이까지 한 어른이라 모두 깍듯이 받드는 판인데 항렬로도 한참 아래인 영조는 부름이 즉 어명이나 다를 바 없었다.

고산영감의 바둑 실력은 그야말로 양반실력이라 엉성했다. 그러나 일찍 끝내고 놓여나오고 싶으면 적당한 선에서 잡혀 죽어야지 섣불리 이기고 마는 날에는 그날 밤 조기석방은 포기해야 했다. 그러니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려면 첫판에는 이기더라도 다음은 두어 판 내리 져 주어야 석방이었다. 때로는 바둑 대신 이야기상대로 잡히기도 했다. 집안 대소가에서는 모두가 어려워하는 어른이라 맞상대하기를 꺼렸다. 그러나 마침 고향 학교로 전근이 되어 온 영조는 그런 것을 별로 가리지 않는 편이니 심심해서 죽을 지경인 영감으로서는 안성맞춤인 말상대였다.

“이여송이 바둑의 명수였느니라.”

하고 또 선문답이었다. 영조는 여러 번 들어서 달달 꿰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영감님은 까마득히 잊고 있는 모양이었다.

“명나라 장수 말입니까?”

“그렇지. 그 이여송이 선조임금과 바둑을 두었더니라.”

“물론 선조임금이 이겼겠지요.”

하며 적당히 맞장구를 친다. 이런 때 공연히 몇 번이나 들은 이야기라고 말해 버리는 것은 어른 대접이 아니다. 고산 영감은 흥이 났다.

“그게 아니다. 이여송이 원체 고수라 선조임금은 상대가 안 되었느니라. 그렇다고 임금님이 진다면 나라 체면이 말이 아니지.”

“이여송이 일부러 져 줬겠네요?”

“그것도 아니다. 마침 옆에 시립해 있던 이항복이 보다 못해 받치고 있는 양산에 구멍을 내서 비치는 햇살로 돌려가며 훈수를 했느니라.”

“아, 백사 이항복 말입니까? 임진왜란 때 공이 많았지요. 광해조 때 인목대비 폐모를 반대하다 북청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때 남긴 시조가 있습니다. 철령 높은 재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

문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영감은 손을 저었다.

“어허, 얘기를 딴 데로 돌리지 마라. 그걸 눈치 챈 이여송이 몇 수 두다가 웃으며 돌을 던졌다는구나.”

“지는 것두 멋있게 졌는데요.”

이렇게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니 영감으로서는 더 바랄 나위 없는 상대였다. 조금 귀찮기는 해도 말상대가 없어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영감을 위해 영조는 십분 봉사 정신을 발휘해야만 했다.

고산영감은 나이가 들었대서 영감이 아니라 실제로 조선 말기에 고산군수를 지냈던 것이다. 그가 어떻게 고을을 다스렸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적어도 한일 합방에 반기를 든 관리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항일투쟁에 직접 나섰다거나 합방 반대를 부르짖은 우국열사는 아니었다. 나라가 일본에게 넘어가자 단 한 푼일지라도 왜놈에게 넘겨줄 수 없다 하여 군청에 있는 공금을 몽땅 챙겨서 만주로 망명했다. 그러나 말이 망명이지 실상은 첩과 하인까지 거느린 호화로운 도피였다. 흥청망청까지는 아니라 해도 생산성 없는 외국 생활이 오래 갈 리 없다. 더구나 독립운동은 직접 몸을 던져야지 입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무렵 많은 망명객들이 그랬듯이 가만히 앉아서 비분강개를 일삼았지만 영감은 그 축에도 끼지 못하고 주로 기루에서 돈을 탕진했다. 돈이 바닥이 나자 별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래도 고향에는 상당한 전답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열이 넘는 딸들 여위살이에 오뉴월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고산영감에게는 자녀가 자그마치 열 하고도 다섯이나 되었다. 물론 한 배가 아니라 여러 배 태생이었다. 당시 지방 고을살이를 하는 벼슬아치들은 본처를 데리고 가지 않는 게 상례였다. 고향에서 봉제사나 받들고 자녀 양육을 도맡고 있었기 때문이기 도 했다. 벼슬아치들로서는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다. 사또들은 관에 배속되어 있는 관기나 가난하고 미천한 처자 중에서 현지 조달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고산영감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본댁에서 아들을 얻지 못한 영감은 닥치는 대로 씨를 뿌렸다. 그런데 워낙 기술이 부실했던지 계속 딸만 열 하고도 셋을 얻었다. 그럴수록 더욱 분발한 보람이 있었던지, 아니면 갈고 닦은 기술이 진가를 발휘했던지 기생첩에서 아들 둘을 얻었다. 아무튼 가계를 이어갈 아들을 얻었으니 조상 앞에 면목을 세울 수 있었다.

어찌 되었건 딸이 열 셋이니 그 여위살이에 기둥뿌리가 열세 개는 달아났다. 전답 은 거짓말처럼 줄어들었다. 게다가 맏아들은 장가는 갔지만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요절했고 둘째 아들은 부친을 닮아 난봉기가 다분히 있어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또 축냈다. 설상가상으로 농지개혁으로 소작을 준 전답마저 떼이고 보니 이젠 먹고 지내기에도 힘겨울 지경이었고, 이래저래 상심한 고산영감은 두문불출로 심심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터였다.

이런 고산영감의 심심풀이 대상으로 찍힌 것이 영조이었다. 모두가 어려워하는 집안 어른이니 부르지 않더라도 가끔은 문안을 드려야 할 판인데 일부러 부르는 데야 핑계 댈 재간이 없었다. 또 영감의 고색창연한 이야기를 일방통행으로 듣는 것도 그런대로 괜찮았고, 바둑을 일부러 져 주는 것도 외로운 영감을 위해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고산영감이 두는 대국방식은 그 실력만큼이나 고색이 창연했다. 처음부터 한 점 한 점 둬 나가는 현대식이 아니라 미리 화점에 깔아 놓고 시작하는 것이다. 공격과 방어는 현대 바둑과 다를 바 없지만 끝내기가 달랐다. 잡은 돌을 상대방 집에 메우는 게 아니라 무조건 돌려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포로의 무조건 석방이었다. 그리고 단수로 죽지 않는 곳은 다 긁어내서 집으로 계산하는 것도 현대와 달랐다. 영조가 요즘 바둑 법을 소개하니까

“엥이, 너무 야박해서 못 쓰겄다. 그런 것은 섬나라 왜놈들이나 좋아할 방식이다.”

하고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하루는 또 퇴근길에 호출을 당해서 방에 들어서자 인사도 하기 전에

“축문두 가르치느냐?”

다짜고짜 선문답이 날아들었다.

“예?”

“아이들에게 축문 쓰는 걸 가르치느냔 말이다.”

영조는 뒤통수를 긁었다.

“웬 걸요. 저부터 쓸 줄 모르는데요. 유세차로 시작해서 상향으로 끝난다는 정도밖에 모릅니다.”

영감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엥이, 헛공부했구나.”

퇴근길에 호출을 당한 터라 읽고 있던 소설책을 끼고 있었다.

“그게 무슨 책이냐?”

영감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소설책입니다.”

“진서로 쓴 거냐?”

“아닙니다. 축문도 못 쓰는 주제에 무슨 진서겠습니까?”

영감은 또 혀를 찼다.

“그게 다 꾸며낸 얘기지?”

“그럼요. 소설은 다 꾸며낸 얘기지요.”

“그래도 삼국지나 옥루몽 같은 것은 사실이었느니라.”

관우나 제갈량이 나오는 삼국지는 그렇다 쳐도 옥루몽까지 실화라는 데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아니라고 우겨 봤자 혼만 날 것이 뻔하므로 웃고 있는데 저녁상이 나 왔다. 그러나 상은 따로따로였다. 어떤 손님이 오더라도 영감은 겸상을 하는 법이 없다. 드물게도 닭고기를 넣은 미역국이었다.

“오늘이 영감 생신이라네.”

노마님의 설명을 듣고서야 닭국의 내력을 알았다. 왕래하는 친구도 없는 영감으로서는 각별한 초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생신날인데도 그 많은 자녀들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식사를 하면서도 고산영감은 계속 소설책을 물고 늘어졌다.

“그게 다 연애타령이겠지?”

“연애가 주는 아니지만 소설에는 약방에 감초처럼 사랑 이야기가 들어가기 마련이 지요.”

“옥루몽에도 사랑 이야기는 있느니라.”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차례로 거느리는 거 말입니까?”

“대장부 사내가 그 정도는 돼야지.”

소실로 얻어 들이는 것은 많을수록 자랑인 것이다. 그러나 총각 처녀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간통죄 버금 갈 만큼 큰 죄가 된다. 그것도 총각 쪽은 흠이 덜 되지만 처녀 쪽은 작살나는 것이다. 그런 영감의 윤리관에 항변하는 것은 지구를 거꾸로 돌리려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런 영감이라 여러 여자를 거느리는 방면에는 도가 터 있었다. 역시 집안 어른 중에 면장을 지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면장이 딴 살림을 차렸다. 옥도라는 기생퇴물인데 읍내까지 떠돌아 와서 술집을 차렸다. 얼굴이 잘난 것도 아니고 몸매가 날씬한 것도 아니었다. 허풍이 대단해서 옛날에 무용가 최승희와 평양 기생학교 동창이라고 떠벌였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판소리 한 가락은 뽑을 줄 알았다. 그러나 목소리가 여름 날 잘못 된 막걸리처럼 푹 쉬어서 듣기 거북했다. 그녀가 은근히 자랑하는 옛날의 화려했다는 흔적을 굳이 찾는다면 북 장단 정도라고 할까. 아무튼 옥도의 북채 잡는 솜씨 하나는 예사롭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면장이 반한 것은 판소리나 북장단이 아니라 잠자리 기교라는 소문이었다. 그 방면에 얼마나 도가 트였는지 웬만한 장터 건달들도 새벽녘이면 헬레레가 되어서 기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방면에 웬만큼 관록이 붙어 있는 면장이 푹 빠져 들고 말았다. 그러한 면장을 붙들고 영감의 방사술 강의가 걸작이었다.

“세 계집 네 계집 거느릴라면 요령이 있어야 하느니. 잠자리할 때마다 방사를 하면 견뎌 낼 장사 없지. 적당히 계집만 만족 시키고 내려올 수 있는 요령을 익혀야 하느니.”

영감은 생물학에 대한 지식이 또 대단했다.

“살무사란 이름은 잘못 되었느니라.”

불려간 어느 날 또 나온 선문답이었다.

“물리면 죽는다는 독사 말입니까?”

“그렇지. 원래는 살무사가 아니라 살모사니라. 죽일 살자, 어미 모자········”

“어미를 죽인다는 뜻입니까?”

“뱀은 알로 낳지만 살모사는 새끼로 낳는다. 그런데 그 새끼란 놈들이 어미 뱃속을 다 뜯어 먹구 나온다. 그래서 살모사라는 이름이 붙었느니라.”

살무사가 난태생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나는 불효막심한 동물인 줄은 몰랐다. 고산영감의 생물학 중에서도 학에 대한 학설은 단연 압권이었다.

“학이란 놈도 알로 낳는 게 아니고 새끼로 낳느니라.”

영조는 직접 본 일은 없지만 속으로 웃고 말았다. 얼른 방향을 돌렸다.

“겨울에 서산 바닷가를 지나다 학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웬 사람들이 저렇게 늘어서 있나 했지요.”

그러자 영감은 딱한 듯 웃었다.

“학은 삼신산 같은 심산유곡에서 신선과 함께 살기 때문에 속인 눈에는 뜨이지 않느니라. 네가 본 것은 학이 아니지.”

우겨 봤자 소용없으므로 되물었다.

“그럼 영감님두 보지 못하셨겠네요?”

하니까 시원찮은 치아로 고기를 우물거리며 조금 겸손해졌다.

“그야 나도 속인이니깐·······”

“정말 신선이 있기는 있는 겁니까?”

영감은 확신하듯 빈약한 수염을 쓰다듬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도 있잖으냐? 이태백이 고래 등 타고 등천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건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니라.”

옆에서 마님이 핀잔을 주었다.

“어이구, 국 다 식겄네유. 잡숫구 얘기 나누셔유.”

영감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에는 국어학으로 비약했다.

“벼를 왜 나락이라구 하는지 아느냐?”

여기서 언어의 사회성이니 역사성이니 떠들어 보았자 씨도 안 먹는 소리였다. 깨끗이 항복했다.

“모르겠는데요.”

“옛날에는 나라에서 녹으로 벼를 주었느니라. 나라의 ‘나’자와 ‘녹’을 합쳐 ‘나록’ 이던 것이 변해서 나락이 된 것이다.”

소를 끌고 장에 가던 두 농부가 먹구름을 보고 내기를 했다. 비가 올 것이다 안 올 것이다 우기다가 소를 걸고 내기를 했다. 그래 ‘소내기’ 가 소나기로 되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의 민중어원설이었다.

고산영감은 또 시대를 개탄했다.

“세상이 자꾸 망조가 드는구나. 학교 훈장이라는 너부터가 축문 하나 제대로 못 쓰니 말이다. 옛 성현의 글을 팽개치구 언문 부스러기나 가르치구 있으니 망조가 들 수밖에 없지. 옛날에는 성인군자도 많고 효자 열녀도 많았느니라. 그게 다 성현의 글 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걸 멀리 하고 있으니 한심하다. 불효자식은 늘어만 가고 아이 놈들은 어른 공경할 줄 모르고…… 한 나라의 임금만 해도 그렇다. 원래 임금은 하늘 이 내는 법인데 지금은 투푠가 뭔가로 대통령이라는 걸 뽑고 있으니 말이다. 나라 살림을 맡을 국회의원이라는 것도 그렇다. 명문가의 뼈대 있는 집안에서 나와야 하는데 지금은 뭐냐? 돈만 있으면 반상이 따로 없고 상하가 따로 없으니…… 엥이, 망조다 망조.”

그 성현의 글 덕분에 우리가 발명한 것이라고는 짐을 지는 지게밖에 없노라고 한 마디 하려다 그만 두었다.

그러한 고산영감의 둘째 아들이 국회의원에 입후보했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처음 치루는 선거라 더욱 요란했다.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선거바람이 판쳤다. 돈다발이 난무했다. 돈다발이 없는 사람은 연고나 문중을 업고 나섰는데 영감의 둘째가 여기에 끼어 있었다. 젊어서 재산깨나 축낸 그는 이 근방에 모를 부은 듯 흩어져 사는 문중 표를 등에 업고 나섰던 것이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 간다구 나를 국회로 보내면 당장 문중 재실부터 새로 짓겠습니다. 소두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구 문중에 하나쯤 기둥이 있어야 비벼대지 않겠습니까? 나를 국회로 보내 주시오. 되로 받고 말로 갚겠습니다.”

이것이 그가 내건 주된 선거공약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문중 일가붙이를 들쑤시고 다녀도 맨입으론 어림도 없었다. 둘째 아들은 얼마 안 남은 재산을 탈탈 털어 올린 끝에 고산영감을 찾아와 매달렸다.

“아버지, 조금만 밀어 주십시오. 조금만 더 밀어 주시면 당선은 따 놓은 당상입니다요.”

영감은 기가 막히다 못해 화를 냈다.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이었지만 조자룡이 창 내두르듯 마구 내흔들어 작살낸 게 네 놈 아니었더냐?”

“빚이래두 얻어 주십시오. 아버지 한 마디면 장리쌀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당선만 되면 열 배 스무 배로 갚겠습니다.”

고산영감은 기가 막혀 흰 수염을 비비 꼬았다.

“국회의원 자리가 돈 방석이래두 된다더냐? 나라 일은 너 아니래두 떠맡을 사람 수두룩하다.”

둘째는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입후보한 강 아무개나 윤아무개를 보십시오. 돈만 좀 있다뿐이지 상종 못할 순 쌍것들입니다. 옛날 같으면 어디라구 감히 맞설 생각을 갖겠습니까? 그자들 버릇을 고쳐 주기 위해서래두 제가 꼭 당선돼야만 한다니까요. 아버지, 조금만 힘을 보태 주십시오. 이번만 살려 주십시오.”

이 애절한 호소에 넘어간 것은 정작 영감이 아니라 노마님이었다. 영감 몰래 여기저기서 빚을 끌어댔다. 그러나 그 보람도 없이 개표 결과는 참담했다. 술이나 얻어먹을 때는 찰떡같던 문중 표조차 개떡만도 못하게 나왔으니 말이다.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알거지가 된 둘째아들은 행방을 감추었고, 얼마 남지 않은 고산영감네 전답도 집도 빚쟁이들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살 곳을 잃은 영감네 식구는 선산에 붙어 있는 산지기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식구라고 해야 왕년에 숙부인으로 대접받던 노마님과 여종에서 발탁되어 딸만 넷을 낳고 부엌살림을 도맡아 온 작은댁이 전부였다. 아들농사는 그렇다 치고 열이 넘는 딸들 중에도 망조가 든 친정 뒤치다꺼리를 해 줄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고르고 골라서 내 노라 하는 양반집으로 출가를 시켰건만 고르고 골라서 쪽박신세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시대가 변해도 한참 변했다. 앞 다투어 줄을 서던 산지기도 떠나버려 폐옥이 되다

시피한 집을 대충 손을 보고 이사를 든 것까지는 그런 대로 괜찮았는데 정작 그 때부터가 문제였다. 삼시 세 끼 걱정은 문중 사람들의 배려로 그럭저럭 모면한다지만 문제는 고산영감이었다. 이사를 한 직후부터 이상이 온 것이다.

산지기 외딴집이 좀 떨어져 있는 탓도 있지만 걸핏하면 영조에게 내려지던 호출령 이 뚝 끊어졌다. 궁금해진 영조가 짬을 내어 고기하고 술병을 들고 찾아갔더니 영감은 툇마루 끝에 돌이 되어 있었다. 선문답도 바둑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다. 뿐만 아 니라 아예 영조를 알아보지도 못 했다.

“날씨가 무척 더워졌습니다.”

영조가 큰절을 올렸지만 영감은 여전히 무반응이었다. 가뜩이나 노쇠한 얼굴이 아예 해골로 변해 있었다. 그건 사람이라기보다 차라리 낡아빠진 하나의 유물이라는 편이 옳았다. 연애를 간통죄만큼이나 금기로 여기는 고풍스런 윤리관도 살무사나 학에 대한 옹고집 이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시대의 조류에 밀려 볼품없이 망가진 유물이 동그마니 있을 뿐이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고산영감은 며칠을 더 견디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영조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허전함을 금할 수 없었다. 속으로 빌었다.

“어르신, 고래 등이 아니더라도 새끼를 낳는다는 학을 불러 그 등에 타고 훨훨 등천 하십시오. 가다가 이태백을 만나 문여하사승상학(問汝何事乘翔鶴)하거든 소이부답 (笑而不答)하십시오. 그러면 이승의 번뇌 훌훌 떨고 심자한(心自閑) 하시리이다.”